2010/06/08 18:31


애플의 CEO 스티브잡스는 애플(apple.inc)이 인문학과 기술의 경계에 있다고 말했다. 기술은 굉장히 빠르고인문학은 느리디 느린 학문인데 이 둘의 조화는 그리 매끄럽지 않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기술의 첨단에 있습니다”라고 해도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경쟁사보다 더 나아보일까 말까 할텐데, 이 얼마나 엉뚱한가.

iPad는 기존의 종이책을 단순히 iPad의 디스플레이에 옮겨놓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iPad의 멀티터치기능과 중력센서, LCD컬러 디스플레이, 마이크, 스피커, 나침반 등 하드웨어파트와 애플에서 제공하는 고기능 그래픽처리 소프트웨어와 2D물리엔진 등을 활용하여 기존의 "종이책"이라는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낼 것이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예를 몇 가지 든다면, iPad용으로 나온 몇몇 가지 동화책 애플리케이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유아(사용자)가 그림 속 닭이나 말 그림에 손을갖다 대면(Tapping) 닭과 말이 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하늘에 해가 떠있는 이미지에 손가락을 해에 갖다 대고 언덕 밑으로 숨기면(Tap&moving) '해가 지다'라는 이야기가 구성되는 동시에 화면 안에 있던 개체들에그림자가 생기며 노을 분위기로 전환된다. 가로등에 손을 갖다 대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현관문에 손을 갖다 대면 노크소리가 나게 된다.

이러한 기능은 기존의 컴퓨터에서 구현 가능했지만 크게 쓸모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컴퓨터와는 전혀차원이 다른, 무엇보다도 "직관적"인 iPad라는 터치기반 미디어의 등장으로 쌍방향적 소통을 위한 상상들이매우 쓸모 있고 가치 있게 다시 태어나고 있다. 즉, ‘참여가치’를 극대화해 새로운 ‘아우라’를 발생시키는 iPad콘텐츠-혹은 새로운 디지털 예술작품들이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회화 이미지의 경험방식은 아우라(Aura)였다. 아우라란 고대 그리스어의 기원에 따르면 '입김'이나'공기'를 의미하며, 종교적 의미에서는 '영기'를 의미한다. 일차적으로 아우라는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그만의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이다. 그리고 예술작품이 아우라를 지니게 되는 것은 그 대상의 객관적 속성(진품성)과 일회적, 원본이라는 속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3 그리고 이 아우라는 의식적 기능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이 의식적 기능이란 제의(숭배)가치인데, 이것은 예술작품이 종교적인 의식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다.

발터 벤야민은 전통적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기술)복제에 의해 파괴된다고 했다. 그는 당시에 발전한 사진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아우라가 특정한 예술작품의 물질적 진품성(현존성), 유일무이성(일회적 속성), 소유 불가능성(원본)이라는 근거를 갖고 있다면, 사진은 대상의 영상 이미지화를 통해서 물질적 현존성을, 복제를 통해서 유일무이성을, 편재성을 통해서 소유 불가능성을 무효화함으로써 아우라의 발생 조건들을 해체시킨다. 벤야민은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전통은 청산되며, 그것들이 가진 제의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했다. 그리고 이 변화들은 예술작품의 전시가치를 높일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기술복제가 만연한, 아니 기술복제 없이는 제작자체를 상상하기 힘든, 지금의 디지털 기술복제시대예술작품에는 아우라가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시대의 예술작품에는 새로운 성격의 아우라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예술작품의 생산자가 만들어낸 아우라가 아닌, 디지털 예술작품의 감상자(사용자)가 만들어낸 아우라다. 복제를 통해 해체된 듯 보였던 유일무이성을 사용자 고유의 인터랙션을 통해 재생산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아우라를 ‘참여가치’라 명명하겠다. 이를 iPad의 콘텐츠, 특히 동화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해 예술작품이 갖는 객관적 속성에 대해 언급함과 동시에 주관적 속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이 주관적 속성은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을 마주한 “주체”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주관성으로그것은 그의 글 <산딸기 오믈렛>에서도 드러난다.

주관적 속성의 아우라는 일회적인 스침이라는 점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과 유사하다. 예술작품을 마주한 “주체”에 따라 그 스침은 변화무쌍하게 된다. 그리고 아우라는 예술작품에 의해서만 규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 즉 예술작품의 “사용자”에 의해서도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사진이나 영화, 책과 같은 미디어들도 사용자에 의해 아우라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iPad라는 직관적이고 상호작용이 가능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사용자의 몫은 더욱 커졌다.




1995년 픽사에서 제작해 흥행에 성공한 <토이스토리>는 iPad용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작됐다. 이미 전세계 앱스토어에공개되어 누구나 원하면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토이스토리의 원작영화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아이들이 혼자서 동화를 따라 읽을 수 있도록 기획됐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마치 종이동화책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을 읽는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풍부한 텍스트를 지니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용자는 색칠공부도 할 수 있고, 영화에 삽입된 주제가를 따라 부를 수도 있다. 이야기에 꼭 맞는 게임도 포함돼 있는데 이야기 중간에 흐름에 적합한 게임을 즐김으로써 이야기는 더욱 흡입력을 갖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iPad용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작되었다. 단순히 종이책을 넘어서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부분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 주목할 만 하다. 앞으로 아이들은 동화의 이야기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페이지에서 자신만의 놀이를 만들어 즐기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회화에서 볼 수 있었던 제의가치도 아니고 전시가치도 아니다. 사용자가 만들어나가는 이야기, 제작자의 의도보다 사용자의 구성이 중요해진 ‘참여가치’인 것이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에서 자아와 대상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미메시스의 경험 ”은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극대화된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의 사전 작업으로 1935년에 쓰여진 작은 논문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벤야민은 사진 이미지 안에 있는 세 개의 시선에 주목한다. ‘카메라의 시선(생산)’, ‘관람자의 시선(수용)’, ‘미메시스적 시선’이다. 미메시스적 시선은 카메라와 관람자의 시선을 변증법적으로 매개시켜주는 또 하나의 시선이다. 그는 세 시선의 변증법적 관계를 살펴보는 것을 통해 사진 이미지와 아우라를 ‘구출적 비판(rettendeKritik)’의 관계로 놓는다. 이는 기존의 회화에서 보였던 아우라의 전통성을 현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iPad의 ‘참여가치’는 디지털 미메시스적 경험을 통해 현재적으로 재구성된다. <토이스토리>에서 색칠공부를 할 때 아이들은 원작 애니메이션의 색깔대로만 주인공을 칠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색을 캐릭터에 입히고, 자신만의 고유한(유일무이성) 캐릭터를 갖게 된다. 좀 더 나아가 새롭게 칠한 캐릭터를 통해 아이들의 현재 심리상태, 욕구충족 상태, 감성 상태 등을 읽어낼 수도 있다. 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관은 iPad용 콘텐츠에서 쌍방향적인 스토리 구조를 제공하는 것을 통해 수없이 많은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산될 것이다.

이렇듯 서로 무관한 파편들 사이에서 ‘비감각적 유사성 (Unsinnliche Aehnlichkeit)’을 구성하고 발견해내는미메시스의 능력은 iPad 콘텐츠-디지털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더욱 다채롭게 피어날 수 있다.
이제 막 시작된 변화는 체감할 만큼 가시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iPad의 등장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디지털 예술작품의 등장은 급격히 우리 삶을 바꿔나갈 것이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애완용 고양이도 작동시킬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인 iPad는 발터 벤야민 시대의 사진과 영화만큼이나 새로운 시선과 분석을 기다리는 매체다. 사용자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아우라를 발견하고 자신이 직접 만들어가는 아우라를 즐기게 될 것이다. 이것의 예술과 예술을 담는 매체의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