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01 11:08
아들 놈이 서재 가장 낮은칸에 꽂혀있던 앨범을 모조리 꺼내왔다.
모두 5권이니 5번은 왔다갔다 한 것 같다.
7번 째 생일 선물로 너만의 추억을 꾸며보라고 선물한
가죽커버의 사진앨범이 맘에 드나보다.
당장 시작하겠다고 나선게 골치아파질 것 같지만
일단은 두고보기로 한다.
내 어릴 적 사진앨범부터 뒤적인다.
거기엔 네 사진없어 라고 말했지만 이미 이 녀석은 몰입 중이다.
잠시 커피를 채우러 다녀온 사이에 이 녀석, 새 앨범부터 뒤지는게 빠르다는 걸
깨달은 듯 하다. 영특하다.
이미 잘 정리돼있는 앨범 중에서 자기 얼굴이 조막만하게라도 나온 사진이라면
모조리 다 뜯어내고 있다.
사진 모서리에 손톱 밑이 찔렸는지 악악 소리와 호들갑을 떨어가면서
정돈상태를 혼돈상태로 들춰내고 있다.
당장 뭔가를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저 성격은 도대체 누굴 닮은걸까,
내가 어릴 때도 그랬나,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서 한번 물어볼까 생각하며 커피를 홀짝인다.
이제 겨우 4장 째 앨범을 채우고있으니 족히 1시간은 더 걸릴 것 같다.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 녀석이 결혼앨범을 낑낑대며 들고와선
내가 보던 신문위에 떨쳐놓는다.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이다.
7살한테만 느낄 수 있는 톰소여의 모험 같은 표정이랄까?
결혼식 하객들과 찍은 사진이다.
아, 지금 생각해도 머리 끝이 쭈뼛쭈뼛선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장인어른한테 아내 손을 넘겨받을 때 방향을 잘못 잡아 하객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처음하는 거니 괜찮다며 깔깔대며 위로해주던 친구들 얘기는 귓등을 타고 흘러내렸고
당신이 꿈꾸던 완벽한 결혼에 비해서 한 없이 부족했던 모든 것이 미안하다고
아내에게 수도 없이 말했던 것 같다.
그런 기억들의 부연설명 없이도 사진 속 내 표정에서
'드레스를 밟아 당신을 만인 앞에서 휘청하게한, 그것도 신랑신부행진 때, 너무 미안해'라고 말하는 걸
읽을 것 같다.
"나는 왜 없어!"
"뭐? 저는 왜 없어요 라고 해야지!"
"아, 저는 왜 없어요?"
"너도 알잖니. 아빠랑 엄마가 이 날 결혼을 한거고 그리고 나서 너가 태어난 거니깐
너는 이때 세상에 있지도 않았어."
"그래도 이렇게 엄마 아빠가 멋있는 옷입고, 파티ㅡ하는데 내가 없는게 싫어요."
파티 라는 단어를 최근에 배워서 그런지 좀 뜸을 들여가면서 말한다.
"미안해. 하지만 올해가 결혼 10주년이니깐, 응 10년 째 되는 해니깐 이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근사하게 옷 입고 파티하려고 해. 너도 초대할게. 괜찮지?"
지금보면 촌스럽지만 그 때만 해도 큰돈주고 빌려입은 내 턱시도를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말했다.
그래도 이 녀석 표정은 영 맘에 안든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직은 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모르니 기분이 나쁘면 나쁜 것이고 좋으면 좋은 것이다.
"정호야, 이건 그저 옛날사진 일 뿐이야.
지금은 아빠가 너와 이렇게 함께 있지만, 이 사진을 찍을 당시인 10년 전만해도
세상에 없었어. 아마 하늘나라에 있었지도 모르겠네.
이 사진은 네가 아무리 입을 내밀고 퉁퉁거리도 바뀌지 않을거야.
봐봐. 그저 오래된 사진일 뿐이야.
물론 네 사진을 여기 가장자리에 합성에 집어 넣을수야 있겠지만
그건 여전히 있었던 사실도 아니고 너가 그 때 사건을 변화시킬 수도 없단다.
'옛날사진'은 옛날사진으로 받아들여야 해.
물론 옛날사진이 너에게 말해주는 것이 많겠지.
봐봐. 아빠가 이 때는 머리가 완전히 검정색이었지? 봐, 지금은 흰머리가 제법 많지?
아빠가 원래 흰머리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건 네가 알 수 있겠지만,
사진 속의 아빠와 지금 너와 같이 있는 이 아빠는 많이 다르단다.
저 때보다 훨씬 건강하고 즐거울 줄 알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일도 더 잘 하고
여유도 있고 당당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단다.
아마 네가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으로 가서 이 아빠를 만났다면
이 아빠를 지금만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너무 얘기를 길게해버렸다. 중간 쯤에서 말을 끊었어야는 건데 ...
여전히 나는 너가 좋아하기엔 너무 어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알았어요" 라고 말하고 다시 사진사냥을 떠나는 아들의 발걸음을 보니
아직 기분은 안 풀렸다. 이해하기 힘들지. 힘들 수 밖에...
너와 내가 옛날사진의 시간만큼, 아니 그 보다 더 긴 시간을 같이 보내고나면
그 때 쯤은 이해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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